본문 바로가기

사 색

영화 오펜하이머 (2023) :: 재능과 신념. 두 경계의 갈등

반응형
생각해보자. 단숨에 세상을 바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당신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나에게 오펜하이머는 그러한 질문을 던져주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이고, 그 선택에 대한 신념은 어디에서 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인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해 수박 겉핧기 수준으로는 알고 있었다. 마케팅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본 작품의 국내 개봉 당일인 8월 15일. 나는 단 하나의 궁금증을 가지고 이영화를 예매했다. '과연 실존주의를 추구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은 트리니티 실험을 어떻게 재현했을까?' 여러가지 가설이 머리속에서 쉴틈없이 굴러가는 와중에, 극장에 도착했다. 아이맥스는 아니었지만 가장 뒷편의 자리를 선택해놓은 것은 관람 이후 스스로 칭찬이 될만한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완성도는 적절했고, 비주얼과 사운드 모두 훌륭했다. 이야기의 흐름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치가 있긴 하지만, 플롯 자체에서 오는 지루함을 어떻게 떨치느냐가 평가의 척도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 아래 내용부터 본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될 수 있습니다. 

 

 

3. 그건 나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영화는 한명의 물리학자가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성취해가며 발전해가는 가운데, 세상을 뒤집을 논란의 무기를 만들게 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하며, 이후 어떠한 대가를 치루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고, 사회 질서의 변화를 꾀하던 시기. 어느 한편에 서는것을 원치 않았지만, 피하거나 외면하지는 않는 모습과 용기는 여러 의미를 전해주었다. 결과적으로 말년에 겪게되는 고초의 원인이 되어버린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정면으로 응수하는 자세는 한 인물, 본 작품의 가장 모태가 되는 메시지인 '한 개인의 신념'이라고 판단했다. 

살다보면, 원치 않는 방향에서 조차 삶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자주 마주친다. 대게 그렇듯 나 또한 그렇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자 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건설적이지 않은 논쟁을 좋아할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모든 상황이 그렇지는 않더라도 대체적으로 그러한 것을 겪게 되는 상황이다.

킬러언 머피가 분한 오펜하이머가 보이고자 했던 신념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로 해석할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그의 인격적인 면을 보면 이와 별개로 논란의 소지는 충분하겠지만) 극중 초반에 보여지는 타지에서의 지독한 향수병과 학문적인 발전이 더딘 악순환의 상황에서 한 동료의 권유와 함께 비추어지는 미술관의 풍경, 책, 음악 등의 요소는 그의 상상을 자극하던 분열이라는 요소를 발전시키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처한 이 현실에서 이를 조화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에서도 내 주머니속의 몇인치 스크린으로 탐색을 권장할 것이 아닌 보다 현실적인 조언으로 비춘다. 실제적으로 그는 멘하탄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써 뛰어난 인물들을 섭외하고 연구를 독려해 3년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어 낸 중요 역활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형감각과 조화는 그가 오랜시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던 것들에 관한 바탕이 아니었을까.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영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자의 계략에 빠진 상황에서 꽤 답답해보이는 모습으로 일관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거나 꺽지 않고 초연하게 모든 것을 관철시킬 뿐이었다. 한편으로 그 덕분에 누명이 벗겨지는 듯 했지만, 이와 반대로 그의 치적을 강탈당하는 수모를 겪는 것은 신념을 따른 댓가일지, 혹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상이 받아들인 그의 성과의 댓가일지 모르겠지만.

 

 

2. 우리가 그걸 현실로 만든 것 같아요

여기 세상을 단숨에 변화시킬 엄청난 무기를 당신이 손에 쥐고 있다.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견해에 달려있다. 무엇을 하든, 어떻게 다루든 그것은 당신의 의지에 달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듯, 이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온전한 당신의 몫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가장 큰 업적으로 널리 알려진 원자폭탄의 개발 과정을 따라가는 전개는 여러 군상들이 섞이면서도 끊임없이도 주인공인 오펜하이머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면, 영화의 흐름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근본적인 질문이 되는  '신념'에 대한 기준과 선택의 가치를 놓고 대립하는 두 극단적인 인물의 향배속에, 정치극으로써의 관점도 흥미롭게 전개된다. 물론 결과적으로만 보면 오펜하이머 개인에 대한 전기를 따라가는 것이 큰 틀이지만, 무심코 놓치게 되는 스트로스 제독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의 오해(?)와 원한으로 시작되는 둘의 대립은 인물들이 그려내고자 하는 이상향을 막힘없이 보여준다. 고고한 순리자라는 롤이 붙은 천재 물리학자인 그이지만 결국 자신의 본능과 욕구에는 한낯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을 서슴없이 확인할 수 있다. (다소 충격적? 으로 느낀 대목이기도 했는데, 감독 특성상 정사씬을 넣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된다.)

어찌되었든, 오펜하이머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나아가고자 했던 학문의 발전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댓가 또한 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면 충분히 숙연해진다. 기술의 발전을 중시해 그외의 것을 도외시한 결과가 이렇게 참담하게 돌아왔다면, 앞으로 어떻게 생각 해야 하는 것일까. 

 

 

1.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에 파괴자가 되었도다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이 좋았던 장치를 꼽자면 단연 사운드였다. 많은 군중이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로 일제히 구르는 발소리가 작중 내내 들려오는데, 이를 장치적으로 놓고 보면 오펜하이머의 심리 그 자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상당히 흡입력이 뛰어나다. 또는 원자들이 폭발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나 원자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상황을 대입해서 보더라도 긴장감이 크게 고조된다. 사실 실험의 요소보다도 더 와닿았던 것은 그 이후의 반응이었다.

강당에 모여 실험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보여지는 폭탄의 섬광과 원자가 분열되는 듯한 긴장감. 자신들의 만들어 낸 기술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빼곡히 채워넣은 칠판 속 공식이 아닌 현실로 마주친 사람들의 오열과 자괴감. 이를 조우하는 오펜하이머의 일그러지는 표정에서 보여지는 무수한 감정선은, 그간 다양한 영화속에서 보았던 CG로 표현된 거대한 폭발과 섬광 보다도 더 와닿았다는 점은 놀란 감독이 만들어 내는 연출의 정수를 이해하기 충분한 대목이었다.

(생각해보자.아무리 영화라고 할지라도 실제 핵을 터뜨리는 것이 미장센이라는 장치와 동일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인지. 게다가 당대 천재라고 불리는 석학을 포함한 13만명이라는 인원들이 한 공간에서 거진 3년이라는 기간 내내 매달린 끝에 만들어 낸 거대한 실험이자, 20억 달러 (현 기준 330억 달러, 한화 약 42조원)를 갈아 넣은 대 프로젝트이다. 올해 우리나라 국방 예산이 57조원이다. 이는 전체 예산이다.)

 


이와는 반대로 개인적으로 가장 큰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던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보기보다 다소 김이 빠지는 연출을 보여준다. 작중 연출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얼마나 거대한 폭발의 위력을 보여주는 지에 대한 장면들은 충분히 차고 넘치지만 모든 이야기의 클라이막스 지점이라 볼 수 있는 해당 장면은 위력이 아닌 분위기에 집중하는 설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기존 예고 상에서 보여준 호기심이나 상상력의 맥락은 감독의 성향과는 다르게 다소 축소된 느낌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생각해볼 지점은 CG기술이 무한 발전중인 현 시점에서 고전적이고 가장 원초적인 방향으로 이를 보여준 것은 극의 분위기를 해치는 수준까지 미치지는 못하다. 실제 실험의 기준을 비교해서 행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이 현실이고, 이미 한계가 정해진 가운데 미학적으로 선보여야 하는 장면을 재현해낸 점은 놀란 감독 스러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오펜하이머라는 작품은 전기의 구조를 띈 드라마이지만 그 안에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놀란 감독 특유의 실존주의적 성향의 사고와 킬리언 머피의 극 사실적인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한 몰입을 선사한다. 한가지 걸리는 점은 '얼마나 흥미롭냐?'라는 질문에는 선듯 답을 내놓기 어렵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럼에도 그가 고통스럽게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던 신의 영역의 재능을 바탕으로 밟아가는 자취속에 수혜를 입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의 연구에 작지만 깊은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해본다.

 

 

[사진출처] © 2023. Universal Pictures | UPI 코리아 

※ 본 리뷰는 CHRP '문화유랑단'에도 동시 기재 되는 리뷰입니다.

 

(초고) 2023.08.16

반응형